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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이야기(일반개요, 문화 , 역사)

by 강강돌이 2023. 3. 20.

마다가스카르의 명물 바오밥 나무

마다가스카르를 아시나요? 생택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바오바브 나무가 자라는 곳,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섬, 이 정도 아신다면 당신은 마다가스카르에 대해 많이 아는 사람입니다. 대부분은 나라 이름인지도 모르지요. 우리가 모른다고 없는 곳이 아닙니다. 오늘은 마다가스카르의 일반개요, 문화, 역사에 대해 알아봅시다.

 

마다가스카르 일반개요

지리적으로 아프리카 남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내륙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과 구분된다. 국가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이 크고 다양한 문화와 민족 구성을 볼 수 있다. 전체 인구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는 메리나, 베칠레오, 베치미사라카 세 민족의 외모는 동양적인 느낌이 강하다. 현지어인 말라가시어는 말레이-폴리네시아 어족에 속한다. 전통적인 대가족이 많고 결혼 전까지 자녀와 부모가 함께 거주한다. 연로자를 존중하고 결혼을 정할 때 양가의 가족이 모여 상견례를 하며 사후에 조상들이 후손을 지켜준다고 믿어 무덤에 제사를 지내는 등 한국과 유사한 풍습도 보인다.

 

문화

말리가시어 ‘무라무라’는 ‘천천히’라는 뜻임. 마다가스카르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성급하지 않고 느긋하다. 은행 및 관공서의 근무시간은 8:00-16:00이고 점심시간은 12:00-14:00이다. 토요일은 오전만 영업하는 곳이 많다. 약속을 잡을 때 시간적 여유를 두는 것이 좋으며, 물건을 주문할 때도 필요한 때보다 앞서 주문하는 것을 추천한다. 국가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며, 내륙 아프리카와 동일 집단으로 묶어 얘기하면 개개인의 차이는 있지만 거부감을 느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직급체계가 분명하고 체면을 중시하며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에 겉으로 표현을 하지 않아도 관계가 틀어질 위험이 있다. 마다가스카르 사람들의 성과 이름은 매우 길고 어려운 편이다. 일례로, 영국 가디언지는 직전 대통령인 헤리 라자오나리맘피아니나(Hery Martial Rakotoarimanana Rajaonarimampianina) 전 대통령 이름을 세계에서 가장 긴 국가지도자 이름으로 소개하기도 하였다.

 

역사

통일 이전 상황

마다가스카르의 선주민은 아프리카 대륙 본토의 흑인이 아니라 약 기원후 300년에서 기원후 800년 사이에 인도네시아의 보르네오 섬에서 이주해 온 말레이 계통의 사람들이다. 그들이 어떻게 8,000km가 넘는 인도양을 횡단할 수 있었는 의문이 있었는데 여러 연구에 따르면 무역풍을 타고 자바섬이나 인도양의 섬들을 따라 이동한다면 당시 항해기술로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또한 아프리카 동부에서 이주해 온 반투족도 있었는데 지리상의 차이로 인해 두 종족은 그다지 접점이 없이 오랫동안 고립되어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항해자들은 인도인들도 있었으며, 9세기에는 아랍계 사람들도 내항하였다. 특히 스와힐리를 정복하고 동아프리카에 오만 제국을 건설했던 오만인들이나 잔지바르 쪽에 살던 아랍인들이 대거 내항하여 이슬람을 전파하고 노예무역을 했다고 전해진다. 1500년 포르투갈인 디오구 디아스가 유럽인에게 처음 소개하였고 17~18세기에 프랑스가 남해안에 기지를 건설하고 총독을 임명하였으나 현지 원주민의 반발로 철수하기도 하였다. 1811년에는 영국이 토아마시나를 점령하였다.

 

메리나 왕국의 통일

한편 소규모 부족 왕국이 난립 하던 마다가스카르에도 통일의 바람이 불었다. 중앙 마다가스카르 고원에서 1540년 소규모 부족국가로 출발한 메리나 왕국의 주도로 통일운동이 개시되었다. 1787년 안드리아나암포이메리나 국왕이 등장하여 당시 섬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던 사칼라바족을 격퇴하고 18개 부족을 하나로 묶어 메리나 왕조가 섬의 패권을 잡았다. 그의 아들 라마다 1세 때 서구적인 개혁을 추진하여 모리셔스의 영국 총독의 도움을 받아 군대를 영국 방식으로 훈련시켰다. 또한 노예무역을 폐지하고 학교를 설립하고 알파벳을 활용하여 마다가스카르어를 표기하는 등 근대화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1828년 라다마 1세가 사망하고, 라다마 1세의 왕비가 라나발로나 1세로서 즉위했는데 그녀는 유럽을 적대시하는 정책으로 전환하여 1835년에 기독교 선교를 금지했다. 1861년 라나발로나 1세가 사망하고 그 아들이 라다마 2세로서 즉위하여 다시 유럽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반발을 사 1863년에 암살을 당하고 말았다. 라다마 2세의 뒤를 이어 그의 왕비였던 라스헤리나가 즉위했으나 겨우 5년 만에 사망하고 사촌 여동생인 라모마(Ramoma)가 1868년 라나발로나 2세로서 즉위한다. 라나발로나 2세는 성공회를 국교로 지정하고 행정 개혁에 힘을 썼지만, 잦은 왕의 교체로 이미 힘을 잃은 메리나 왕국은 점점 쇠퇴해 갔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

이렇듯 메리나 왕국이 쇠퇴를 계속하는 상황을 틈탄 프랑스는 영국의 식민지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1883년에 1차 프랑스-마다가스카르 전쟁을 일으켜 타마타부를 점령했다. 1883년에 라나발로나 2세가 사망하자 그 사촌 여동생이 라나발로나 3세로서 즉위했다. 이후 계속된 프랑스의 간섭이 이루어져 2차 프랑스-마다가스카르 전쟁이 벌어졌다. 압도적인 서구의 무력에 완패한 메리나 왕국은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1897년 마지막 여왕 라나발로나 3세는 폐위되어 프랑스의 레위니옹섬에 유배되면서 프랑스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프랑스는 마다가스카르에 프랑스령 말라가시를 설치했다. 식민 통치 기간에는 메리나족의 대규모 반란도 터졌으나 프랑스의 가혹한 무력 앞에 진압당했다. 이후 식민지 교육과 기반 시설이 갖춰지고 교역량이 늘어 경제가 발전하면서 프랑스의 통치는 안정되어 갔다. 한편 메리나족의 지식층은 서구 교육을 받아들이며 차츰 프랑스에 대한 독립의지를 다져간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의 마다가스카르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마다가스카르는 비시 프랑스 정부에 복속된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추축국 세력이 아프리카로 진출할 것을 우려한 영국이 비시 프랑스군을 공격하여 섬을 점령하였다. 1943년 영국은 자유 프랑스 정부에 섬 전체를 반환했다. 당초 나치 독일은 유럽의 유대인들을 전부 마다가스카르에 수용할 구상을 했었다. 하지만 사실상 마다가스카르까지 이송할 수 없어 계획은 폐기되었다.

 

프랑스로부터 독립과 1 공화국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마다가스카르에도 독립의 바람이 다시 불어 1947년 동부에서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하지만 프랑스는 잔인하게 진압했고, 무수한 사망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인도차이나 반도에 있는 프랑스 식민지가 모조리 독립하자 다른 식민지 국가들도 독립의지를 불태우며 게릴라를 벌이며 항전했고 또한 전후 복구 비용 때문에 식민지 유지 비용이 감당이 안된 프랑스는 1958년에 자치 공화국을 인정하고 1960년 마다가스카르는 완전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독립 후에도 프랑스에 경제적 종속은 계속되고 경제난에 시달린 국민들의 불만은 늘어갔다.

 

2 공화국

1972년 대규모 폭동 결과 1 공화국이 무너지고 건국의 아버지라 불렸던 필리베르트 츠시라나나 초대 대통령은 사임하여 가브리엘 라마난초아 장군을 중심으로 한 2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라마난초아 장군은 사회주의권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농장의 국유화를 선언하는 등 사회주의화를 시도했으나, 각지의 반발과 내부갈등은 끊이지 않아 장관들이 암살되는 등 혼란이 계속되었다. 1975년에 뒤를 이은 디디에 라치라카 대통령은 외국 자본을 몰수하고 사회주의 정책을 계속 밀어붙였다.

 

3 공화국

그러나 1991년 부정부패와 독재에 항거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여 1991년 2 공화국이 무너지고 3 공화국이 들어서 대통령 3선 금지와 5년 임기를 선포했다. 1993년 알베르 자피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계속된 경제난에 국회의 탄핵을 받아 1996년 물러나고 다시 치러진 선거에서 라치라카가 다시 당선되었다. 그 후 2001년 사업가 출신의 마르크 라발로마나나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마다가스카르 혁명에서 알 수 있듯 마다가스카르는 세계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여야 갈등이 심한 나라다. 다른 아프리카 국가와 달리 내전이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경제성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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